# Jan Palach 열사 52주기

18/01/2021

1968년 8월, 바르샤바 조약군이 체코 슬로바키아를 점령하고, 프라하는 무기력에 빠진다.

1969년 1월 16일, 19세의 한 청년이 사회를 일깨우려 Václavské náměstí에서 분신한다.

Miloš Vystrčil 상원의장은 "정당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호소하기 위해 분신을 선택해야만 했던 시대, 그 절박한 젊은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어땠을까 되뇌어 본다. 그리고 그 당시와 전혀 다른 오늘을 살 수 있다는데 감사하다." 로 기념사를 시작했다.

지난 토요일, Miloš Vystrčil 상원의장과 의원들이 프라하 신시가지 광장의 국립박물관을 찾았다. 52년 전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서 였다. 나무 십자가 위에 꽃을 헌정하고 Jan Palach를 위해 묵념했다.

Miloš Vystrčil 상원의장은 "정당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호소하기 위해 분신을 선택해야만 했던 시대, 그 절박한 젊은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어땠을까 되뇌어 본다. 그리고 그 당시와 전혀 다른 오늘을 살 수 있다는데 감사하다." 로 기념사를 시작했다.

1969년 1월 25일, Jan Palach의 장례식은 수많은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시민들은 고요히 그를 추모했다. 고요한 장례식은 스무살 청년이 그토록 원했던 자유를 향한 침묵의 시위장이기도 했다. Jan Palach는 프라하의 Olšanské hřbitovy에 묻혔다. 당초 그의 장지로 Vyšehrad가 물망에 올랐으나 공산당이 이를 철저히 막아섰다. 오랜 협의 끝에 겨우 프라하의 공동묘지에 안치할 수 있었다. Olšanské hřbitovy의 Jan Palach 무덤은 체코인 뿐만 아니라 서구 언론인들이 일부러 찾는 장소가 되었다. 당시 공안 순찰대는 묘지 관리국과 함께 Palach에게 헌정된 촛불, 꽃, 메세지 등을 주기적으로 치우며 주위를 경계하고 감시했다. 급기야 당시 공산당 시의장이었던 Antonín Kapek은 Palach의 무덤을 아예 없애버리기로 한다. 국가안보국은 Palach의 어머니를 압박하여 아들의 무덤을 없애고 시신을 화장하도록 유도한다. Palach는 1973년 화장되어, 고향인 Všetaty로 이장된다.

작년 11월, Jan Palach는 30년이 지나서야 처음 잠들었던 Olšanské hřbitovy로 돌아왔다.

출처: ČT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