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Vítkov 전투 600주년

17/07/2020

2020년 7월 14일은 종교개혁가 후스를 따르는 후스인들이 십자군에 대항하여 벌어진 Vítkov 전투에서 위대한 승리를 기록한지 600주년 되는 날이다.

Jan Hus가 1415년 화형을 당하고 mistr Jeroným 마저 이듬해 화형되자, 몇 년간 체코땅은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이 시기는 새로운 성서의 가르침과 이종성찬의 영향으로 희망이 꽃핀 시간이었던 동시에 카톨릭과 후스인들 사이의 긴장은 더욱 깊어지던 때 였다. 종교적, 사회적, 국가적인 여러 문제가 복합되어 있었다.

1419년 Václav IV 사후 Zikmund Lucemburský (헝가리 왕 겸 신성로마제국 황제) 가 명목상으로 체코 왕위에 오르자 체코는 종교전쟁의 중심지가 된다. 1419년 7월 말, 급진 후스파가 프라하시 평의원 7명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린 이른바 '창문투척사건'이 일어난다.

1420년 교황 Martin V는 후스와의 성전을 선포하고 Zikmund 왕이 앞장선다.

외눈 장군 Jan Žižka가 이끈 후스군은 Sudoměř 첫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머쥔다.

Jan Žižka는 불패의 명장으로 불리는 극도의 전술 실용주의자였다. 대부분 농부였던 후스군을 칼, 말, 갑옷으로 훈련하는 대신 익숙한 농기구들을 무기로 사용하도록 했다. 전장에서 쉽게 소통할 수 있도록 깃발 신호 시스템도 처음으로 구축했다. 승리의 정점에는 농업용 수레로 만든 벽 (진) 이 있었다. 수레 벽은 후일 발명된 전차의 전신이다. 후스군은 수레 벽에 숨어서 pištala (총기) 와 houfnice (소형대포 또는 곡사포) 를 쏘았다. 영어 단어 'pistol'과 'howitzer'의 어원이다.

십자군은 보헤미아의 중심 프라하로 다시 진격한다. 군사보급품을 차단하여 후스군을 굶주리게 한다는 작전이었다. 카톨릭 세력은 유리한 지형인 Pražský hrad 과 Vyšehrad를 점령한다. 후스군에 공급될 군사보급로 길목들을 거점삼아 보급품 차단을 꾀했다.

후스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현재 화약탑 지역인 체코땅의 보물창고 Kutná Hora 로 이어지는 가장 주요한 길목 위의 언덕을 차지했다. 바로 Vítkov 언덕이다. Jan Žižka는 언덕 위에 통나무 오두막 두 채를 짓고 주변에 작은 해자를 파서 점토와 돌벽으로 둘러 쌓아 작은 요새를 만들었다. 겨우 남자 26명과 여자 3명이 새로운 언덕 위 요새를 지켰다.

1419년 7월 14일, 십자군의 맹공이 시작됐다.

프라하성에서 까렐교를 건너 구시가지로, 비셰흐라드에서 신시가지 방향으로, Špitálské pole (현 Karlín 지구) 에서 시가지 동쪽 성벽으로 십자군이 밀어닥쳤다. 프라하 수비대의 경계를 Vítkov에서 분산시키려는 작전이었다.

최전선에 선 Jan Žižka 장군은 훈련된 십자군의 공세에 하마터면 죽임당할 뻔 했다. 후스군이 도리깨를 휘두르며 적들에게 포위된 장군을 끌어당겨 간신히 위기에서 탈출했다. 역사가들은 이 날을 십자군의 맹공에 하늘의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이었다고 묘사한다.

이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전설같은 일이 일어난다. 성채를 손에 든 신부가 이끄는 백여명 남짓의 도시 수비대가 화약탑 지구를 점령한 십자군들을 역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뜻밖의 역공에 카톨릭 십자군들이 혼란에 빠졌다. 당황한 십자군들은 뿔뿔이 도망치다가 후스군에게 죽음을 당하거나 Vítkov 절벽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이 전투는 후스군에게 앞으로 있을 십자군과의 여러 전투에서 번번히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님의 전사들' 이라는 신념을 심어주었다.

교황은 후스군을 토벌하기 위해 십자군을 다섯차례 (1420년, 1421년, 1422년, 1427년, 1431년) 파병했다. 그 중 10만명의 십자군을 동원하며 가장 야심차게 시도한 프라하 시 전투파병은 Vítkov에서 신부와 도시 수비대에 의해 어이없이 대패했다.

후스전쟁은 1434년 까지 지속된다.

1436년, Jihlavská kompaktáta (이흘라바 협약) 을 통해 명목상 후스전쟁은 종료된다. 체코인들은 Zikmund Lucemburský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인정했고 이 때부터 왕국에 두 민족 (체코계/독일계, 구교/신교)이 공존하게 되었다.

출처 : ČT 24, wikipedia, Karel Adámek